6.25전쟁 중 학도병들의 활약을 취재하기 위해 2016년 6월 장사상륙작전이 감행되었던 영덕군 남정리 장사리 해안에 있는장사상륙작전 전몰용사 위령탑과 포항 학도의용군전승기념관, 전몰학도충혼탑을 차례로 방문했다 이후 부산유엔공원과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이어지는 일정때문에 시간이 다소 아쉬웠지만 학도의용군을 대표하는 전투였던 포항여중전투가 있었던 자리에 1977년 세워진 학도의용군 625전적비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당시에는 포항여고 정문 앞에 약 600㎡(약 180평) 면적의 소공원 조성을 막 시작한 때였는데 언젠가 다시 한번 온다고 했던 것이 8년만에 이 곳을 다시 방문했다..
조국이 위기에 처했을때 국내외 학생들은 펜대신 총검을 잡고 오직 구국의 일념으로 자진 참전했다. 꽃다운 나이로 7,000여명이 산화하였으며, 국내학생 5만여명과 재일 유학생 641명이 전투에 참가한 것을 비롯하여 약 20여만명이 후방 선무 및 공작, 위문활동, 잔당 소탕작전등에서 활약을 했다.
특히, 포항은 낙동강 최후 방어선으로 육군 제3사단 소속 학도의용군 71명이 포항여중(현, 포항여고)에서 단독으로 전투에 참가하여 김춘식외 41명이 산화한 곳이며 전국에서 제일 많은 학도의용군이 희생된 격전지였다.
특히 영화 '포화속으로'를 통해 알려진 포항여중전투에서는 학도병 71명이 북한군을 맞아 싸우다 48명의 목숨을 바쳐 적의 진격을 지연시킴으로서 학도의용병을 대표하는 전투로 기록되고 있다.
포항시는 2016년부터 ‘학도의용군 호국문화의 길 조성 사업’을 추진해 2018년 마무리했다. 학도의용군전승기념관 리모델링을 비롯해 △기계·안강지구 전투전적비 건립 △포항여고 앞 학도의용군 6·25전적비 이설 △전승기념관 일원 호국전망대 △호국동산·용사의 계단 등을 조성했다.
학도의용군 호국문화의 길은 포학도의용군 625전적비 - 포항시 충혼탑 - 전몰학도 충혼탑 - 학도의용군 전승기념관 - 기계·안강지구 전투전적비 - 기계·안강지구 전투격전지 조망대로 이어진다.
1977년 포항여고 앞에 건립된 학도의용군 625전적비는 2016년에 새롭게 단장하여 세워졌다. 휘호는 김재규(당시 3사단 부관 참모), 증언 김만규 목사, 글씨는 남석 이성조가 썼다.
북한괴뢰 공산군의 불법남침이 있던 1950년 8월 11일 새벽 3시 30분경 중무장으로 탱크를 앞세운 괴뢰군 12사단, 5사단, 유격 766부대가 진공상태에 빠진 아군 3사단 후방지휘소를 기습하여 을 때 조국을 사랑하는 젊은 학도 71명이 교복을 입은 채 M1소총 한 자루에 실탄 250발로 밀려오는 괴뢰군의 공격을 11시간 반동안 버티며 싸우고 반격하다가 실탄이 다하면 개머리판으로 치고 또한 이빨로 물어 뜯는 혈전에 혈전을 거듭하다가 적병의 박격포 수류탄의 폭음에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다 숨져갔으니 이들은 청사에 길이 빛날 호국 학도들의 귀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의 11시간 반의 전투는 무방비 상태에서 방황하던 20여만(피난민)의 시민들을 무사히 피난케 하고 괴뢰군의 주 침공전선을 2시간동안 이나 지연시켰으며 영덕 방면에서 고립상태에 빠진 3사단 주력부대를 절수하는데 크게 도움을 주고 8.15전 부산함락 이라는 적구 김일성의 지상명령을 여지없이 무너뜨렸을 뿐만 아니라 괴뢰군 300여의 시체를 남기고 퇴각케하는 혁혁한 전투였으나 이 전투에서 슬기롭고 용감한 젊은 학도 48명은 영원히 돌아을 수 없는 조국의 수호신이 된 것이다.
“학도병아 잘 싸웠다. 승리의 길로 역적의 공산당을 때려 부셔라, 밀려오는 괴뢰군을 때려죽여라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며 가자” 이는 그날의 학도의용군들의 노래였다.
학도의용군 명비에는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자료 및 당시 전투 참전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전사에 빛나는 학도의용군 호국영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당시의 위급한 전투상황으로 참전자 전원의 이름을 알 길이 없어 전사자 및 생환자 일부의 이름만이 새겨져 있어 안타깝기만 하다.
포항여중 전투에서 전사한 48명 중 10명만 신원이 확인되어 포항여중 앞에 가매장되었다가 1964년 4월 13일 국립현충원으로 봉송되어 학도의용군 무명용사탑 뒤의 화강암 속에 합동으로 안치되었다.
포항여중전투에 참전한 이우근(경기출신, 동성중학교)의 유품에서 발견된 편지. 그는 피 묻은 편지만 남긴 채, 끝내 어머니 품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아래 학도의용군의 편지 전문을 소개한다.
어머니!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10여 명은 될 것입니다. 나는 4명의 특공대원과 함께 수류탄이라는 무서운 폭발 무기를 던져 일순간에 죽이고 말았습니다. 수류탄의 폭음은 저의 고막을 찢어버렸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귓속에는 무서운 굉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머니,
적은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팔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너무나 가혹한 죽음이었습니다.
아무리 적이지만 그들도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더욱이 같은 언어와 같은 피를 나눈 동족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무겁습니다.
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이 복잡하고 괴로운 심정을 어머님께 알려드려야 내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습니다.
저는 무서운 생각이 듭니다. 지금 내 옆에서는 수많은 학구들이 죽음을 기다리는 듯 적이 덤벼들 것을 기다리며 뜨거운 햇빛 아래 엎드려 있습니다. 적은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언제 다시 덤벼들지 모릅니다 .적병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겨우 71명입니다.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 무섭습니다.
어머니,
어서 전쟁이 끝나고 어머니 품에 안기고 싶습니다.
어제 저는 내복을 손수 빨아 입었습니다. 물내 나는 청결한 내복을 입으면서 저는 두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어머님이 빨아주시던 백옥 같은 내복과 내가 빨아 입은 내복을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청결한 내복을 갈아 입으며 왜 수의(壽衣)를 생각해냈는지 모릅니다. 죽은 사람에게 갈아입히는 수의 말입니다.
어머니,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저 많은 적들이 그냥 물러갈 것 같지는 않으니까 말입니다.
어머님, 죽음이 무서운게 아니라,
어머님도 형제들도 못 만난다고 생각하니 무서워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가겠습니다. 꼭 살아서 가겠습니다.
어머니, 이제 겨우 마음이 안정이 되는군요.
어머니 저는 꼭 살아서 다시 어머님 곁으로 가겠습니다.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찬 옹달샘에서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냉수를 한없이 들이키고 싶습니다. 아!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시 또 쓰겠습니다. 어머니 안녕! 안녕! 아, 안녕은 아닙니다. 다시 쓸 테니까요......그럼......
학도의용군625전적비 공원을 새로이 단장하며 전적비 뒷면에는 1950년 8월 11일 그날의 전투 상황을 묘사한 벽화를 아트타일로 새겨 넣었다.
군복이 아닌 교복을 입고 싸운 학도의용군, 역사와 젊음의 혼이 살아있는 이 곳에서 꽃다운 나이 배움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호국의 신으로 산화한 그들의 희생정신과 애국심을 기억하고 잊지 말아야 한다.
'현충시설·전적비·전적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주신흥학교 6.25 참전 용사 명패 (0) | 2024.08.10 |
---|---|
전주 현충시설 - 전주생명과학고(전주농고) 학도병 충혼비 (0) | 2024.08.10 |
포항 현충시설 호국사찰 용화사 위령탑 (1) | 2024.07.29 |
6.25전쟁 격전지 기계·안강지구 전투 전적비 (0) | 2024.07.28 |
포항 현충시설 6.25참전유공자 명예선양비 · 무공수훈자 전공비 (4) | 2024.07.2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