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현충시설·전적비·전적지

호국영웅 故이상득하사 공적비 포항 동해초등학교

by bsuperman 2023. 1. 15.
반응형

포항시 남구 동해면 도구리에 있는 일월사당을 돌아보고 내려오는 길 동해초등학교 한쪽에 세워져 있는 동상과 비석을 발견했다. 동해초등학교는 일제강점기인 1928년 동해공립보통학교로 개교한 역사가 100년에 가까운 초등학교로 아마도 그 역사와 함께 한 동상과 비석이라 생각이 들어 학교로 들어가 살펴 보았다.

동해초등학교 우측 동해면 행정복지센터 쪽 담장 한쪽에는 비석 2기와 조각상이 있는 공적비가 세워져 있었는데 사진에서 보는 차례대로 설명하면 왼쪽부터  '전문교장관홍종철공독독행비' .'순직교우박우석선생추모비' '고이상득육군하사공적비' 이다. 먼저 현충시설(33-2-44)인 호국영웅 故이상득하사 공적비부터 소개한다.

이상득 육군하사는 베트남전쟁 당시 오작교작전중 수류탄에 자신의 몸을 던져 동료들을 구하고 장렬히 산화한 불굴의 백마용사이다. 故이상득하사는 2018년 3월 전쟁기념관이 '3월의 호국인물'로 선정되었고, 경북남부보훈지청은 ‘이상득 육군하사 공적비’를 2022년 7월의 현충시설로 선정했다.

故이상득 육군하사 공적비는 2007년 12월 12일에 고인이 다녔던 동해초등학교에 세워졌다. 경북 포항시 동해면 약전리 출생인 故이상득하사는 동해초등학교 제26회로 졸업했다.  

1965년 6월 육군에 입대한 이하사는 제20사단 61연대에 배속되어 근무하다 1966년 5월 베트남전쟁 파병을 지원해 국군 제9사단(백마부대) 소속으로 참전했다. 1966년 제9사단은 베트남의 요충지인 깜란(Cam Ranh)에서 투이호아(Tuy Hoa)에 이르는 1번 국도변에 배치되어 작전을 펼쳤다.

주월한국군사령부는 1967년 3월부터 5월까지 베트남 중부 해안지역의 베트콩 근거지 소탕과 남북으로 이어져 베트남의 대동맥에 해당하는 1번 국도의 개통을 계획하고 남쪽에 주둔한 제9사단과 북쪽 뀌년(Quy Nhon)에 주둔한 수도사단의 작전지역을 확장·통합하는 오작교작전을 시행했다.

이상득 하사(당시 병장)는 제9사단 28연대 3대대 11중대 3소대 소속 부분대장으로 오작교작전에 참가했다. 작전 첫날인 1967년 3월 8일 이하사가 소속된 11중대는 다랑(Da Rang) 강변의 가옥을 수색하고 있던 중 가옥 내부에 숨겨진 지하 토굴을 발견한 이 하사가 선두에 서서 토굴 내부로 진입한 순간 적이 수류탄을 투척했다. 이를 발견한 이하사는 자신의 몸으로 수류탄을 덮쳐 동료들의 목숨을 구하고 장렬히 산화했다.정부는 이상득 하사의 투철한 군인정신과 희생정신을 높이 평가하여 1계급 특진과 함께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했다.

호국영웅 故이상득하사 공적비 안내문
호국영웅 故이상득하사 공적비 뒷면

전문교장관홍종철공독독행비 · 순직교우박우석선생추모비

순직교우박우석선생추모비

영일만 한가운데 도구해수욕장곁에 자리한 포항시 남구 동해면 도구리 동해초등학교 교정에는바다에 빠진 제자를 구하고 숨진 한 교사의 살신성인을 기록한 비석이 남아 있다. 자신의 목숨을 던져 제자를 구한 박우석 교사의 명복을 빌고 그의 유덕을 길이남기기 위해 영일군교육청은 옛 교사(校舍)한 가운데 공터에 추모비를 세웠다고 한다.

박우석선생순직비를 살펴보다보니 갑자기 스승의 날에 부르던 스승의 은혜 노래가 떠오른다.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우러러 볼 수록 높아만 지네 참되거라 바르거라 가르쳐 주신 ~~~~~ 아아 고마워라 스승의 사랑 아아 보답하리 스승의 은혜

박우석선생순직비 비문에는 아래와 같이 새겨져 있다.

때는 바로 단기4287년(서기 1954년) 7월 9일 오후 1시 동해국민학교 아동 해양훈련의 주간행사로서 2년생 이상 전 아동을 즐거운 헤엄이 시작되었다. 때마침 바람이 변하자 불행이도 급작이 성낸 파도로 변하는 순간 벌써 일부 허덕이는 아동이 생겼다. 이를 발견한 교사는 전원 당황히 구출에 착수하였다.

점점 높아지는 파도에 교사는 모두가 쇠진하여 다시 일어날 힘이 없어졌으나 아직 바다에는 두 아동이 남아 있었다. 6년 담임 박우석 선생은 쇠진된 자기를 돌볼 새도 없이 한 아동을 구한 후 또 다시 뛰어 들어갔다. 

아!! 슬프다. 결국 2년생  金天五(9)군을 안고 한손을 들어 흔들면서 산더미같은 파도에 쌓인 채 그냥 불귀의 혼이 되고 말았다. 미 해병대 배차부대의 모험으로 시체는 찾았으나 때는 이미 수 시간 후였다.

선생은 安康邑 安康里에 계南 거주 朴濟湖씨 2남으로 단기 4255년(서기1922년) 5월 24일 태어나 당시 33세로서 일찍 부산동아대학을 마치고 안강중학교에서 교펀을 잡다가 뜻한 바 있어 국민학교로 전직하여 기계학교에서 동해로 왔으며 뒤에는 權氏부인 딸 信麗 아들 京珉 이 있다. 구내 사백 교육자는 이만 학도와 함께 선생의 명복을 빌고 유덕을 길이 본하고져 이 비를 세우다.  단기 4289년 7월 9일 영일군교육회   

전문교장관홍종철공독독행비

전문교장관홍종철공독행비는 살펴보니 1976년 7월에 세웠는데 홍종철 제19대 문교부장관(1969.4~1971.6)을 기리는 비석으로 보인다. 비석 뒷면에는 "노후된 목조 16개 교실이 당당한 위용으로 바뀌어 지방의 자랑이 되었노라~~~" 와 함께 정무식장군도 나오는데 정무식장군은 포항 출신으로 8·9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홍종철장관과 같이 육사 8기생이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