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의 호국영령들을 찾아 지리산으로 가는 길의 날씨는 우울했다. 지리산에는 늦은 휴가철이었지만 몇일간 내린 비로 탐방로가 통제되어 한산했고 가랑비가 내리며 곧 비가 쏟아질 듯한 날씨가 계속됐다.
민족의 영산이자 현대사의 아픈 역사가 살아 숨쉬고 있는 지리산의 한자락, 뱀사골 초입에 자리잡고 있는 지리산전적비와 지리산충혼탑을 찾아보았다.
지리산 뱀사골로 향하는 남원시 산내면 부운리에는 1948년 이후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지리산에 출몰한 공비토벌작전시 산화한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1979년 기념비를 세워 후세에게 반공교육의 교육장으로 추모코자 건립한 지리산지구 전적비와 2007년 재건립한 지리산충혼탑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1997년 당시에는 2층 건물의 전적기념관과 함께 건립하였는데 전적기념관은 이어서 소개할 예정이다.
지리산지구전적비
일찌기 공산비적의 무리가 삼남의 지붕을 어지럽히던 날,
국군과 전투경찰이 멸공의 횃불을 여기서 밝혀 적도를 토벌하였고,
이 고장 이름없는 애국향민이 신명을 함께 바쳐 햔토를 지켰으니
여기는 대유격전의 효시가 된 곳이요 향토수호의 의자가 뭉쳐 빛난 곳이다.
그날의 증인으로 이 돌을 세우니 세월은 멀어지되 새겨진 얼은 새로우리라.
건립취지
여기 삼남의 지붕에 공산비적이 반거하게 된 것은 1950년 낙동강 선까지 남침했던 북괴군이 우리의 총 반격에 다시 쫓기어 가게되자, 그 일부가 지방공비와 합류하여 이곳에 숨어들게 됨으로부터이다.
당시 이들 적도의 세는 2만에 달하였는바 천험의 산세를 이용하여 도량하되, 그 지역이 동으로는 의령, 서로는 고창, 남으로는 보성, 북으로는 금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양민의 학살과 납치, 재물의 약탈과 방화 등 갖은 만행을 자행하니, 낮에는 태극기가, 밤에는 적기가 나부끼는 양상이 되었다.
이에, 그해 말부터 이곳 남원을 중심으로, 국군 6개 사단과 2개 독립연대, 그리고 6개 독립대대 및 전투경찰 4개 연대와 7개 독립대대, 그리고 11개 경찰서의 의용경찰과 대한청년단 특공대 등이 힘을 모아 이들을 함께 무찔러, 1952년을 고비로 그 세를 꺽고, 1954년에는 조직의 뿌리를 잘라 드디어 이를 초멸하였다.
돌이켜 보건데, 그때 이 평정이 이루어지지 못횄더라면, 어찌 오늘 이곳 곡창에서 격양가가 메아리 칠 수 있었겠는가? 다시금 고개숙여 그날의 충혼을 기린다.
지리산충혼탑
지리산충혼탑은 민족의 가슴에 붉은 상처를 안겨준 민족상잔의 비극 625사변때에 전쟁이 격량에 휩싸여 지리산에서 빨치산과 괴뢰군잔당을 토벌하다가 목숨을 잃은 민경군 7,283명의 영령을 모신 곳으로 지리산지구전적비 옆에 2007년 재건립했다.
처음에는 1955년 5월 15일 이승만 초대대통령의 휘호 충혼(忠魂)릏 새긴 이 충혼탑을 광한루원에 세웠으나 1987년 6월 6일 영령들이 산화하신 이 곳 뱀사골 현장으로 옮겼다고 한다.
지리산 충혼탑을 넓게 두른 벽에는 한국전쟁 당시 희생된 7,287분( 군인 1,231명, 경찰 3,342명, 민간인 2,714명)의 이름이 빼곡히 새겨져 있다
지리산충혼탑에서는 매년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얼을 기리는 추념식이 열리고 있으며, 전국 각처에서 보훈단체, 학생 등 수시로 찾아와 조국을 위해 ㅅ나화한 순국선열에 대한 명복을 기리며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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