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7대 작전 중의 하나인 장단사천강지구전투는 6.25 전쟁 당시 서울을 수복한 해병대가 약 495일 동안 5000여 명의 병력으로 중공군 4만2000여 명의 공격을 격퇴해 정전이 되기까지 파주·문산 일대를 사수한 해병대 대표 전투로 이 전투를 통해 휴전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고 수도 서울을 다시 한 번 굳건히 사수했다.
625전쟁기간 해병대 전사자의 40%가 발생할 만큼 치열했던 장단·사천강지구전투에서 해병대는 또 한 번의 전설을 기록하며 개성-판문점-서울로 이어지는 축선을 지켜내고 수도 서울을 굳건히 사수한 것은 물론, 군사분계선이 우리에게 유리하게 설정되는데 크게 기여했다.
현재 장단·사천강지구전투와 관련된 전적비는 도라산 평화공원의 해병대 파로비를 비롯하여 임진각 평화누리공원의 장단·사천강지구전투 전승기념비, 파주 안보공원의 해병 제1상륙사단 전공선양비가 있다.
파주시 조리읍 56번 국도변에 세워진 해병 제1상륙사단 전공선양비는 해병대 제1상륙사단의 전신인 해병1연대가 세운 공훈을 기리기 위해 파주 금촌에서 포항으로 사단이 재배치되기 직전인 1958년 3월 15일에 세운 것이다. 건립 장소도 처음에는 파주시 금촌읍 아동1리 지역이었다가 1986년 등원리로 옮겨 확장 건립했다. 이후, 2007년 9월 7일에는 파주 교하신도시 인근 56번 국도변의 안보공원에 현재의 전공선양비를 재건립했다.
이 전공선양비에는 해병의 기백을 표상한 높이 17m의 비와 당시 전투에서 백병전을 벌였던 해병대원들을 형상화한 청동 3인 용사상, 팔각기단, 바닥 도형, 전적부조 등이 세워져 있고, 한편에는 상륙돌격장갑차 2대와 전투상황을 소개하는 안내판이 있다.
장단·사천강지구전투 전승기념비는 2014년 11월 13일에 경기도 파주시 임진각 평화누리공원 에 2014년 11월 13일 세워졌다. 기념비에는 당시 전사한 해병대 776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비 중앙에 495일간의 치열한 전투 장면을 도드라지게 새긴 양각화, 좌우에 '상승해병'과 '무적해병' 휘호, 비문과 헌시 등이 조각되어 있다.
해병대파로비 海兵隊破虜碑
해병대파로비는 임진각에 전승기념비를 세우기 전 2008년 10월 28일에 경기도 파주시 장단면 노상리 1번지에 위치한 도라산 평화공원에 세워졌다. 전투 현장인 장단과 가장 가까운 민통선지역이다. ‘해병대 파로비’라는 비명은 해병들의 감투정신과 용맹성으로 중공군을 무찌르고(깨뜨릴 破, 오랑캐 虜) 이 땅을 지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러한 비명을 지은 이는 당시 중공군과 싸운 해병대1전투단의 부단장이었던 공정식 전 사령관이다.
당시 해병대는 5,000여 명에 불과한 병력으로 중공군 4개 사단 4만2,000여 명과 맞섰다. 치열한 전투로 아군은 776명이 전사하고 3,214명이 부상했다. 비문에는 아래와 같이 새겨져 있다.
1952년 3월 중·동부 전선에서 이곳 서부전선 장단.사찬강지구로 이동한 해병대는 1953년 7월 휴전까지 해병 특유의 감투정신과 용맹성으로 중공군을 무찌르고(破 : 깨트린 파, 虜 오랑캐 로) 이 땅을 지켰다.
이 싸움터에서 자유조국의 수호신이 된 776명의 젊은 해병 영령들이여! 그대들의 투혼과 공훈은 이 겨레와 더불어 영원 무궁하리라.
이 장단·사천강지구 전투 전사자 중에는 김용호 소위가 있다. 김용호 소위는 4차 전투에서 75명의 병력으로 중공군을 맞아 전투를 벌여 중공군 115명을 격멸하는 전과도 올렸지만, 전투 후에 자신의 소대원 70여명이 전사한 것을 확인하고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유서에는 ‘부하를 많이 희생해 중대장을 뵐 면목이 없다며 대원들이 잠든 이 고지위에서 죽음을 택했다’고 적혔다. 이후 김 소위는 1계급 특진과 함께 충무무공훈장이 추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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